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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의 역사

노버트 위너와 사이버네틱스

by 앤드뉴스타 2020. 5. 8.

노버트 위너는 인터넷, 통신분야에서 많은 이들에게 존경받고 칭송받는 인물 중 하나이다. 노버트 위너는 IT기술의 큰 줄기 중 하나를 만들기도 했다. 과학의 필요성이 더욱더 커지게 된 계기는 전쟁이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연합군은 일본에 원자폭탄을 투하했다. 히로시마에 투하된 원자폭탄은 순식간에 많은 것들을 잿더미로 만들었다. 이 상황에서 노버트 위너는 인간적 요소의 부재를 보고 경악했다.  그리고 과학이 삶에서 인간적인 요소를 줄이기 위해 존재하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미국은 전쟁 승리의 목표를 가지고 있었다. 목표 달성을 위해 전쟁 무기 개발 프로젝트를 만들고 로버트 위너를 포함한 유수 대학 연구자들을 투입했다.

노버트 위너는 사이버네틱스 개념을 만들었다. 인터넷의 출발의 지점이 된 시기를 많은 전문가들은 제2차 세계대전쯤으로 지정하고 있다.

노버트 위너는 매사추세츠 공과대학 출신으로 천재였다. 그의 아버지 리오 위너는 러시아 태생으로 40개의 언어를 구사하는 언어천재였다. 노버트 위너는 청소년 때 수학을 전공했고 그 외 생물학, 철학도 공부했다. 성인이 되어서는 독일 괴팅겐을 주기적으로 방문해서 이론물리학의 기초를 닦았다. 다양한 학문을 접하면서 과학은 학제 간 연구를 추진해야 미래가 있다고 확신하게 되었다. 그리고 과학, 철학을 잘 융합해야 더 나은 기술로 발전할 수 있다는 것에 집중했다. 여기에서 사이버네틱스 개념이 탄생했다. 

노버트 위너는 그의 제자 섀넌과 전자 스위치 회로에서 통신으로 전달된 정보를 측정할 수 있는 가능성을 만드는 연구를 진행했다. 1942년 이 정보처리 단위를 binary digit의 약자 비트로 지정했다. 비트는 디지털 시대의 원자이다. 비트로 디지털 시대를 연 노버트 위너는 자신의 생각을 집대성한 사이버네틱스 책을 1948년 출간해 새로운 과학의 시대를 열였다.

또한, 노버트 위너는 인간과 기계의 상호작용에 몰두했다. 적을 죽일 기계를 만드는 연구를 했지만 전쟁 이후에는 신경생리학에 관심을 가졌다. 감각기관에 손상을 입은 이들을 위해 인공 보장구를 만들기도 했다. 기계와 인간의 항호 피드백이 작동해야 가장 효과적이라는 사실을 이해한 것이다.

1950년 노버트 위너는 '인간이 인간을 이용하는 방법: 사이버네틱스와 사회' 베스트셀러를 저술했다. 이 책은 자동 시스템, 인간의 관습 및 제도 사이의 관계를 기술했다. 그리고 사이버네틱스를 사회학의 차원에서 다뤘다. 이때부터 사람들은 온라인과 네트워크, 비트로 이루어진 디지털 사회를 사이버 사회로 부르기 시작했다.

사이버네틱스의 어원은 고대 그리스어 퀴베 르네 테스의 방향타, 조절기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유명한 과학자 제임스 클리스 맥스웰은 1868년 조절기 논문을 발표했다. 아노킨은 1935년 생물의 신경세포에서도 기계에서의 피드백과 유사한 기전을 밝혀내며 생물과의 접점을 찾아냈다. 노버트 위너의 사이버네틱스는 이러한 다양한 의미들을 포괄한 개념을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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