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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의 역사

월드와이드웹의 시대

by 앤드뉴스타 2020. 6. 2.

월드와이드 웹 시대로의 전환은 인터넷 패러다임의 전환을 의미했다. 월드와이드 웹 이전의 인터넷은 전화를 중심으로 하는 통신망의 연장선에서 고려되었던 것이다. 실제로 인터넷 위에서 동작하는 대부분의 애플리케이션들은 이메일이나 파일을 공유하는 서비스, 서버에 원격으로 접속하여 자원을 공유하는 것과 같이 기본적으로 '통신과 공유'라는 패러다임에서 대부분 진행되었다.

그에 비해서 월드와이드 웹을 처음으로 탄생시킨 물리학자 그룹들의 관심사는 과학 논문에 있었다. 특히 SLAC에서 가지고 있었던 30만 개가 넘는 과학 문서들은 거대한 콘텐츠 서버로서 일종의 킬러 서비스가 되었고, 여기에 매료된 전 세계의 물리학자들은 이를 쉽게 브라우 징 하면서 접근할 수 있는 인터페이스 기술에 목말라 있었다. 그리고 여기에 딱 들어맞는 기술이 바로 웹이었다. 웹은 통신과 컴퓨터 네트워크 중심의 패러다임을 콘텐츠 패러다임으로 전환하게 만드는 역할을 하였다.

처음 웹이 발표되었을 때의 분위기를 보면, 열광적이었던 물리학자들에 비해 일반인들에게는 의외로 폭발적인 반응을 얻지 못했다. 보통 사람들에게는 SLAC가 가지고 있는 물리학 중심의 과학 문서들이 그다지 중요하게 생각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더구나 당시에는 정보를 메뉴 방식으로 구성해서 쉽게 찾아가는 고퍼라는 서비스가 인기를 끌고 있었는데, 고퍼와 상당 부분 장점이 겹치는 웹은 느린 인터넷 ㅗ한경에서 그다지 커다란 비교우위를 보여주지 못했다.

고퍼는 정보를 주제별, 종류별로 구분하여 메뉴로 구성해서 인터넷 정보에 접근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인터넷에 익숙하지 않은 사용자라도 제공되는 메뉴만 따라가면 쉽게 원하는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또한 고퍼 서버들끼리는 서로가 연결되어 있어서, 여러 개의 고퍼 서버를 옮겨 다니면서 쉽게 정보를 검색할 수 있었다. 게다가 기존의 인터넷에서 많이 이용되던 원격 접속을 위한 텔넷 서비스나 파일 전송, 뉴스 서비스 등도 고퍼 서비스 내에서 간단히 접근할 수 있었기에 많은 인기를 끌면서 확산되기 시작했다. 고퍼는 웹과 비슷한 시기인 1991년 미국 미네소타 주립대학에서 개발되었다. '고퍼'라는 이름도 미네소타 주립대학 스포츠 팀의 마스코트인 땅다람쥐에서 따온 것이다. 고퍼를 사용하면서 더불러 베로니카나 저그 헤드 같은 서비스를 이용하면 수많은 고퍼 메뉴 중에서도 사용자가 원하는 메뉴만을 탐색하는 것이 가능했다.

인터넷 패러다임에서 콘텐츠와 정보 중심의 패러다임으로 이동하는 경향이 명확했던 시기가 있었다. 거의 동시에 유럽과 미국에서 각각 ㅊ눌발한 웹과 고퍼는 당시 미래의 인터넷 인프라를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라이벌이었다. 1993년까지는 고퍼가 일방적으로 앞서는 분위기였다. 특히 속도가 너무 느린 네트워크는 웹이 그림 등을 포괄하는 풍부한 콘텐츠를 전달할 수 있는 장점을 갖췄음에도 불고하고, 당시로서는 단순하면서도 적절하게 텍스트를 기반으로 빠르게 반응했던 덕분에 고퍼의 손을 들어주는 결정적 요소로 작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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